매향비와 두레 향도 등의 연관용어 총정리를 해봐요
- 한국의 역사/중세
- 2019. 11. 12. 23:37
안녕하세요 '쵸코팡팡'입니다.
저의 블로그에서는 여러가지 테마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국사(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연재형식으로 자주 다룰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오늘 다룰 주제는 매향비! 입니다.
설마 기생 '매향'의 비석일까요?. 아닙니다.
또한 매향비는 역사공부를 하다보면 종종 듣고 보게되는 '매향향도' '향도' 와도 글자가 비슷하고, 뭔가 연관이 있어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요?
더구나 '용화향도' , '두레',이들과는 무슨 연관이라도 있을까요?
궁금하시죠? 그럼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사천매향비의 모습입니다.>
들어가기 앞서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사천매향비는 고려사회를 알 수 있는 대표적 유물 중 하나입니다.
시험에 빈번하게 잘 나오니 반드시 숙지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사천매향비 확대 사진, 저기 적혀 있는 문자가 역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겠죠?>
#. 글의 목차
1. 당부의말(고려사회 신분제를 먼저 이해하자)
2. 고려사회 신분제 요약
3. 매향비가 뭘까?
4. 두레 향도 등 매향 관련 용어 정리
1. 들어가며...(고려사회의 신분제를 먼저 이해하자.)
그럼 본격적으로 매향비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잠깐 고려사회의 신분제에 대해 공부해 보겠습니다.
<계륵이란 닭의 갈비란 뜻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을 말한다.>
고대 그리고 중세 즉, 고려시대까지의 사회공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정치 파트외에 경제 사회 파트는 참 계륵같은 면이 있습니다.
공부하자니 시험에 잘 안나오고, 그냥 넘어자니 또 빠뜨릴수 없는 중요함이 있습니다.
결국 고민끝에 이 내용(고려사회의 신분제)을 먼저 올립니다.
이러한 고려사회의 신분제에 대한 이해가
'매향비'에 대한 이해에도, 그리고 나아가 고려사회에 대한 지식의 뼈대 또한 좀 더 튼튼하게 해줄 것입니다.
2. 고려사회 신분제 요약
1. 고려시대의 백정은 양민(평민)이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천민계급을 말하는 단어가 아니다!!)
# 백정이란 단어는 특이하게도 고려시대에서는 일반 농민을 뜻한다.
# 향. 소. 부곡. 이곳에 사는 주민들 역시 양민에 속했다.
2. 고려의 여성은 가정 내 지위가 높았다.
# 균등상속, 윤행봉사, 나이순 호적기입
3.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 그렇게 만적이 말했다.
# 무신정변이후 일반농민들도 신분제에 묶여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무신정변이후 많은 민난들이 발생하였다.
3.그런데 매향비가 뭐지?
1. 세종실록의 기록
나주목사 권극화가 전남 신안 팔금도에서 땅에 묻힌 향나무를 파내고
"스님과 속인 300명이 함께 향나무를 묻었다."
라는 기록이 적힌 작은 비석 하나를 풀속에서 발견했다." 라고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 곳곳에 발견되지만...
우리나라 지역 역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러한 매향비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아직 기록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작은 수의 매향비가 발견되었습니다.
3. 민중의 비원을 담은 비석
고려는 외적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려의 민중들은 이러한 힘든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이상세계를 희망하면서 매향을 하고
그 자리에서 조금 비킨 자리에 매향비를 세웠습니다.
미륵불에 기대어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비원을 담은 비석이 바로 "매향비"라 할 수있습니다.
4. 매향비 관련 용어정리
지금부터 매향비와 관련한 용어들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 매향비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해 향을 강이나 바다에 묻는 일을 기록한 비석으로 미륵매향비라고도 한다.
매향이란 미륵불에 대한 간절한 비원을 담은 발원의식으로
단향목, 참나무를 강, 호수, 바다에 묻어 먼 훗날 좋은 침향으로 다시 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침향은 미륵불에 올리는 공양물이다.
우리나라에는 약 12곳에서 매향비가 확인되었다.
대표적 매향비로는 위쪽 사진으로도 있는 사천 매향비가 있다.
※ 매향향도
고려시대에 매향활동을 하는 불교무리를 말한다.
고려후기에는 마을 공동체 조직으로 변모한다.
※ 향도
향도는 여러가지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로
역사적으로는 삼국시대에 불교가 유입된 이후에 불교 신앙활동을 위해 결성된 승속의 단체이다.
향도라는 말은 원래 '향을 피우는 것을 유지하기 위한 무리'라는 뜻이다.
향도는 자발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행정편제 도는 생산공동체 등과는 구별되지만
각 시대 사회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사회변동에 따라 그 조직의 성격도 바뀌었다.
고려시대에 향도는 향촌의 대표적인 신앙조직이자 농민공동체 조직이었다.
지역적으로는 전국에 걸쳐 분포했는데
그 조직과 성격은 신라 하대와 비교하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불상, 종, 석탑, 사찰 조성 또는 법회, 보시, 매향 등
대형불사에 대규모의 노동력과 경제력을 제공하는 등 불교신앙활동의 주류를 담당했다.
고려후기에 이르러 향도가 가진 불교적 신앙 색채가 약화되었다.
그 이후 마을 노역, 혼례, 장례, 마을 수호신 제사등을 주관하는
공동체 조직으로 변모하여 상호부조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지방사회에까지 향약이 보급되고 나서는
향도는 그 하부로 편입되었고 그 기능도 점차 두레로 이전되었다.
결국 향도는 천민들의 친목조직으로 전락하였다.
특히 이웃에 초상이 났을 때 상복과 관을 마련하여
장례를 치르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향도는 상두꾼의 기원으로까지 일컬어지게 되었다.
※용화향도
<김유신의 초상>
화랑도 운동이 크게 일어난 진평왕 때에는 신라사회에 불교가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때문에 화랑도 집단도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아 불교의 미륵신앙과 깊은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화랑을 도솔천에서 내려온 미륵으로 여겼고,
낭도들은 미륵을 추종하는 무리라 여겼다.
화랑 김유신의 무리를 용화향도라 칭했다는 역사기록은 이를 증명한다.
※ 두레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성읍국가시대에 걸쳐 우리나라 촌락 내부에는
청소년조직 같은 인위적 공동체가 발생하여 차츰 발달하였다.
중국의 삼국지 후한서의 동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삼한사회의 마을에는 청소년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를 갖고 있다고 전한다.
오늘날 우리 농촌에서 아직도 쓰이는 '두레'라는 말은 본래 지역공동체의 칭호였는데
그 어원은 들어간다는 의미의 '들 = 들이 = 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으로 매향비와 관련 용어정리
그리고 매향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고려사회 신분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상세하게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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