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 원화제도부터 쇠퇴까지 알아보자.

안녕하세요? '쵸코팡팡'입니다.

이번에는 신라의 화랑도 이야기입니다. 

화랑은 단순히 전쟁터에서나 쓰이는 제물감이 아니었습니다. 

또 어디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족보에도 없는 정체불명의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화랑도는 우리 민족의 일부입니다. 

그렇다고 화랑을 미화할 생각도 아닙니다. 

다만 객관적 사실을 알 필요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화랑도에 관해 공부해 보았습니다.


#. 글의 목차

1. 화랑도의 전신이었던 원화제도

2. 화랑도의 시작

3. 미륵으로 추앙받은 화랑

4. 화랑도의 쇠퇴



1. 화랑도의 전신이었던 원화제도


신라는 4세기 중엽에 연맹왕국을 완성하고 5세기 초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하였습니다. 

당시 신라조정은 국가에 필요한 인재 양성과 등용을 목표로 그때까지 촌락공동체 중심으로 

운영되던 청소년 조직을 중앙정부로 흡수하였습니다

이것이 원화 제도이었습니다.

원화 제도는 당시 젊은이들을 떼지어 놀게 하고 그 행실 등을 살펴 인재로 등용하려 했는데 

그 무리의 수장을 원화라 칭하고, 예쁜 여성 2명을 뽑았습니다.


<2016년에 방영된 드라마 화랑, 배우들의 미모가 강조된 포스터 임을 알수 있다.>


그때 원화로 선출된 이가 남모와 준정이었는데 무려 300에 달하는 젊은이들을 통솔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두 여성이 서로 시기하게 되어 결국 준정이 남모를 강물에 던져

죽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무리는 해산하게 되어 원화 제도는 실패하였습니다.




2. 화랑도의 시작


원화 제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국가인재 양성과 확보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이에 진평왕 대에 이르러 국가에서 정식으로 화랑도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화랑도라는 조직을 통해 국가 인재 양성과 등용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실행하려 한 것입니다.

이같이 화랑도는 교육기관의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랑도는 비록 국가에 의해 조직되었지만,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습니다.

이전부터 전래해오던 촌락공동체의 청소년조직 전통을 기반으로 

중국 율령을 수용하여 학습한 관리조직의 원리를 결합해서 만든 반관반민 단체였습니다.



화랑도는 한 시대에 몇 개의 단체가 같이 존재하였습니다.

하나의 화랑 집단은 화랑 1명, 승려 1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낭도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화랑은 진골 귀족 청소년 가운데 단정한 용모를 가지고 믿음이 깊고 

풍부한 사교성을 가진 사람으로 선출하였고

화랑도에 소속하여 화랑의 스승 역할을 한 승려는 

학문이 깊고 교양이 풍부한 자로 화랑을 지적 정신적으로 지도하였습니다.

낭도들은 대부분 경부에 거주하는 육부민의  자제들이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화랑도는 혈연주의에서 벗어나 자발적이고 자신의 의사로 가입하여 구성되고, 결정된 

일종의 결사체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3. 미륵으로 추앙받은 화랑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


화랑도 운동이 크게 일어난 진평왕 치세에는 

신라 사회에서 불교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화랑도 역시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원광의 세속오계뿐만 아니라 

불교의 미륵신앙과도 깊은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당시 신라사람들은 화랑을 도솔천에서 내려온 미륵으로 생각하였고 

낭도들은 미륵을 추종하는 무리로 여겼다고 전해집니다.

화랑 김유신이 영도하는 화랑도를 용화향도라 불렀다는 역사기록이 이를 뒷받침 해줍니다.


<화랑이었던 김유신의 유명한 일화의 한장면>



화랑도의 단체수련은 3년에 걸쳐 시행되었고 

이 기간 동안 화랑도 집단은 각기 명산대천을 순례하며 국토에 대한 애착심과 충성심을 기르는 한편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충, 효, 신, 용, 인에 의한 도의를 연마하였습니다.

화랑도의 구성원들은 이 세속오계의 덕목 가운데 

특히 충과 신을 소중히 여겼다고 합니다.


화랑도의 수련 중에서도 반드시 빼놓을 수없는 것이 놀이. 즉 노래와 춤이었습니다.

화랑도 집단이 즐겼던 노래와 춤은 정신교육의 측면이 강합니다. 특히 노래가 그렇습니다.

이런 놀이는 화랑도 구성원들이었던 청소년의 의기를 북돋우는 한편 

그들의 인격 형성과 세계관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전합니다.


화랑도는 낭도 각자 자신의 의사에 의해 결정된 조직으로 

조국을 수호하고 나아가 이상세계를 건설하려는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동목표의 달성을 위해 일정한 기간을 단체 수련하며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즉 순국 지상주의를 추구하는 결사 단체였던 것입니다.


화랑도는 삼국통일 시기에 신라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국가에 이바지했음은 물론이고

신라 고유의 골품제라는 신분제에 따라 발생하였던 갈등, 알력, 분쟁 등등을 조절하고 완화하는데에도 

크게 역할하고 기여했다고 전합니다.



4. 화랑도의 쇠퇴와 잔재흔적

삼국통일 후 화랑도의 성격은 크게 변질되고 쇠퇴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삼국통일이라는 군사적 과업이 달성됨으로써 화

도의 존재 근거와 가치는 크게 훼손되어 약화되었습니다. 


또한 삼국통일 후 오랫동안 지속된 안정과 평화, 또한 그 당시 성행한 도교 신선 사상의 영향으로

화랑도의 수련과목 중 놀이의 성격이 강한 노래와 춤만 남게 되었습니다.


신라말 문인 최치원이 화랑의 본정신이 유, 불, 선 3교를 포함하는 것으로 풍류도라 규정한 것도 

결국 화랑도가 변질하였음을 충분히 증명한 것입니다.

그리다 결국 신라의 멸망으로 화랑도라는 제도 결국 역사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팔관회 행사때 선랑들의 가장행렬 상상도 , (김병하 화백)>


하지만 화랑도의 도풍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고려시대의 팔관회의 의식과 민간교육기관 사학 12도의 융성에서 

화랑도의 유풍과 전통이 다소 남아있었음을 확인할 수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가 되면 화랑의 도풍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나마 노래와 춤을 즐기는 가무조합적인 놀이 기능만 남게 됩니다.

이는 현재 무속에서의 남자 무당이나 장레의식에서 상여를 매는 상두꾼에서 

그 흔적이나마 조금 엿볼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화랑도의 전신이었던 원화제도부터 삼국통일 

그리고 쇠퇴기 까지 모두 알아봤습니다. 

그럼 다음에도 또 다른 정보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곳에는 더 많은 정보들이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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